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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잦은 외국순방, 무슨 의미 담겼나

기사승인 2015.11.30  13:5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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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지난 10월 20일 영국을 국빈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악수를 나눴다. (Getty Images)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국제무대에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 공산당 지도자와는 차별화된 모습이다. 특히 올해 시 주석은 더 자주 외국 순방길에 올랐다. 이 같은 빈번한 외국 순방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장쩌민 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장쩌민 정권 시절중공의 외교

장쩌민 전 총서기는 시진핑 정부 출범 직전까지 20여 년간 중공 최고권력을 유지하며, 중공의 외교시스템을 완전히 자기입맛대로 구축·운영했다. 장쩌민은 총서기 직을 기준으로 공식 집권기간(1989~2002년) 이후 후진타오 정부(2002~2012년) 시절에도 정관계 전반에 심어둔 자기파 인물을 이용해 실세로 군림했다.

장쩌민의 기본적인 통치이념은 부패치국(腐敗治國·부패에 따른 국가통치)이었다. 자기 스스로 법과 제도를 무시하고 권력을 남용해 부정축재했고, 이를 따르는 관료들을 중용하고 비호함으로써, 결국 모든 공직사회가 부패하도록 부추겼다.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외국에 넘겨주는 매국(賣國)적 외교 전략을 펼쳤다.

이 같은 정책으로 중공과 서구권의 대재벌은 서로를 이용했다. 서구 재벌은 중국의 시장과 자원을 가져가는 대신 중공에 자금을 제공했고, 이런 자금을 바탕으로 중공은 내부 구성원이 눈앞의 이익과 성공에만 급급하게 만들 수 있었으며, 이는 정통성이 약했던 장쩌민의 집권을 안정시키는 주춧돌이 됐다.

서방 자유세계는 장쩌민 집단이 주는 경제적 이익의 달콤함에 빠져, 정치적으로 중공에 굴복하며 인권·자유 같은 가치관을 포기했다. 이것이 지난 20여 년간 중공과 자유세계 사이 거래의 본질이다.

이로 인해, 1999년 장쩌민이 국가기관과 국력을 총동원해 파룬궁을 탄압할 때, 국제사회는 별다른 비판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중공과 경제적 이익으로 얽혀있었고, 이러한 이익사슬에 따라 중국에 대한 정책과 입장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장쩌민 정부시절, 중공의 외교관은 5대양 6대주를 오가며 ‘퍼주기 외교’로 장쩌민의 인권탄압에 국제사회가 침묵하도록 했다. 장쩌민 본인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독재국가를 포함해 각국과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평등 관계’, ‘정치적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 관계’를 구축했고, 이후 아프리카 각국은 국제사회의 중대한 외교적 이슈에서 무조건 중국을 편들게 됐다.

장쩌민은 정권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자국영토를 국민적 동의 없이 타국에 넘겨주는 일도 불사했다. 100㎦가 넘는 영토를 러시아에 이양하고도 모자라 자국 군대를 러시아 국경에서 500㎞ 뒤로 철수시키고 해당 지역에서는 어떠한 방어적 군사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인도, 구소련 연방국가와 영토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밀실정치로 각종 조약을 체결하면서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관영언론에서조차 발표하지 못하도록 했다.

서방국가에 대해서는 경제적 이익을 내주고 정치적 지지를 얻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장쩌민은 미국과 유럽 각국의 정치인, 기업가, 단체, 학자, 평론가에게 각종 혜택과 특권을 제공하는 대신 인권, 인류 보편적 가치, 사회도덕, 공익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거나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장쩌민은 국제외교분야에서 이익의 사슬을 형성했고, 이러한 사슬은 장쩌민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도 여전히 작동하며, 중국의 법제시스템을 회복시키려는 시진핑 정부에 큰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장쩌민파 인물들외교분야 장악

1993년부터 2013년까지 중공 외교부 부장(장관)을 역임한 첸치천(錢其琛), 탕자쉬안(唐家璿), 리자오싱(李肇星), 양제츠(楊潔箎)는 모두 장쩌민 파에 속한다. 특히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주미 중공대사였던 리자오싱은 장쩌민의 폭력 해외수출정책을 이끈 핵심인물이었다. 리자오싱은 장쩌민의 파룬궁 탄압을 외교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당시 후진타오 주석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또한 주미대사 취임 후 27명의 전담팀을 구성해 주미 중공대사관에 상주시키면서, 장쩌민을 인권탑압 범죄자로 고소하려는 국외 파룬궁 수련자들의 행동에 대응토록 했다.

장쩌민파는 각국 주재 대사관·영사관에 자기진영 인물을 파견해 해당국가 파룬궁 수련자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교란했다. 장쩌민파 핵심인물인 저우융캉(周永康·무기징역 복역 중)은 정법위 서기 재임시절, 정법위 조직을 이용해 중공의 재정과 군사, 외교분야를 총괄하면서 대량의 스파이를 각국에 침투시켰다.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파견된 중공 스파이만 1천명 이상으로 알려졌으며, 전 호주 주재 중공대사관 직원 천융린(陳用林)은 2007년 캐나다에 파견된 중공 스파이가 1천명 이상이라고 폭로한 바 있다.

장쩌민 집단은 중공의 외교 분야를 장악함으로써, 유사시 국제적 이슈를 만들어 중국 내 정적에게 압력을 가하거나 당내 정치게임에 이용하려 했다. 이러한 작업은 2012년 말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에도 줄곧 진행됐다. 그 한 사례가 2012년 센카쿠열도(중국명: 다오위다오) 분쟁이었다. 이 사건은 외국과 영토마찰을 일으킴으로써 후진타오·원자바오·시진핑의 정치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무력충돌로 번질 경우 국가비상사태를 선포, 군부세력을 이용해 후진타오 등을 내몰고 자기세력을 권좌에 앉히려는 음험한 책략이었다.
 

후진타오장쩌민파 교란에 쓴 교훈

장쩌민파가 후진타오 시절에도 중공의 외교 분야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일화가 있다. 딕 체니 미국 전 부통령은 회고록 ‘나의 시대’에서 2002년 주석 취임 전이었던 후진타오가 미국을 방문한 일을 기록했는데, 이 책에서 체니 부통령은 당시 솔직한 생각을 듣기 위해 비공식 단독회담을 제안했고 후진타오가 이에 응해, 두 사람은 수행원 없이 서재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는데, 미처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리자오싱 외교부 부부장이 갑자기 서재로 뛰어들어왔다고 했다. 문밖에서 미국 측 인사가 정중하게 제지했지만, 이에 아랑곳 않고 들어온 리자오싱이 체니 부통령과 후진타오 사이에 앉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언론에 따르면, 후진타오는 크게 분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고록에서는 중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고 전했다. 2004년 체니 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후진타오에게 보내는 서한을 갖고 베이징을 방문했는데, 후진타오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만 전달하라고 부시 대통령이 당부한 편지였다. 체니 부통령은 공식회담을 마친 후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후진타오에게 편지를 전달했지만, 만족한 웃음을 띠며 회의실을 나오는 그에게 미국 측 관료가 조용히 다가가 옆방에서 사람들이 체니와 후진타오의 대화내용을 도청했다고 귀뜸했다. 
 

시진핑장쩌민파 외교시스템 숙청

시진핑 정부는 출범 후 중공 외교부를 대대적으로 물갈이했다. 2013년 3월 장쩌민파였던 양제츠 외교부 부장을 해임시키고, 후임으로 왕이(王毅) 국무원 대만사무실 주임을 임명했다. 이듬해에도 연초부터 외교부 인사변동을 단행해 장쩌민파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외부인’이었던 상무부의 왕차오(王超) 부부장을 외교부 부부장으로 임명했다. 외교부 고위직은 항상 내부인사를 발탁해오던 관행을 깨뜨린 파격 인사였다. 또한 장밍(張明) 외교부 부장 조리를 부부장으로 승진시켰다. 중국 외교부는 부장 아래, 7명의 부부장, 3명의 부장 조리를 두고 있다.

또한 장쩌민파 외교관은 해임했다. 쑹타오(宋濤) 부부장과 자이쥔쩌(翟雋則) 부부장이 자리를 떠났고, 또 올해 1월에는 장쿤성(張昆生) 부장 조리를 기율위반혐의로 조사함으로써, 시진핑 정부 출범 이후 최초로 외교부 고위직을 낙마시켰다. 장쿤성은 1997년 장쩌민의 미국 첫 방문시 연설문 원고를 작성하고 일정조정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주미 중공 대사관 일급비서관으로 임명돼 당시 중공대사 리자오싱의 특별서기보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시진핑중공 틀 벗어난 외교 행보

시진핑은 취임 후 외교방면에서 장쩌민파의 통제와 중공체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14년 7월 시진핑은 한국을 국빈 방문했는데, 이는 2013년 국가주석 취임 후 특정 국가를 개별 방문한 첫 번째 사례였으며, 먼저 북한을 방문하고 한국을 방문한다는 이전까지의 관례를 타파한 행보였다.

시진핑의 중공식 외교관례 타파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시진핑은 외국의 야당과 교분을 쌓았으며 직접 야당 지도자를 접견했다. 인도에서는 야당인 국민대회당 소니야 간디 당대표와 만났으며 태국 야당 지도자 아피스, 뉴질랜드 야당 지도자 앤드류 리트 등과도 만났다. 특히 미얀마 야당 지도자 아웅산 수치와의 회담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미얀마와 중국 사이의 긴장이 고조됐을 때, 아웅산 수치가 6월 10일부터 14일까지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과 회담을 했다. 중공 최고층이 외국 정부의 야당 지도자와 만난 데다 그 인물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라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었다. 둘의 회담 소식은 중국 대형 사이트 첫 화면을 장식했다.

시진핑 정부 출범 후 국가안전위원회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진핑은 새로운 발전전략을 위해 미얀마 정세에 대한 심층 분석을 외교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외교부를 장악한 장쩌민파 관료들은 사고가 경직됐고 시대감각이 뒤떨어져 있었다. 이들은 암암리에 소란을 피우며 아웅산 수치의 방문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시진핑은 국가안전위원회에 외교정책 연구를 요청하는 한편, 군사훈련을 통해 미얀마 정부에 압력을 가했고, 필요하면 국경을 넘는 미얀마군에게 교훈을 가하기도 했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아웅산 수치의 중국방문 일정을 잡음으로써 미얀마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올해 미얀마 대선에 나타날 수 있는 비상시국에 대비했다. 시진핑은 최후에 중앙대외연락부가 아웅산 수치의 중국방문을 책임지도록 지시했으며 또 방문을 요청할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선전하도록 지시했다. 
 

시진핑의 잦은 외국 방문의미는

시진핑이 취임 후 직면한 최대의 압력과 위기는 외교 측면이 아니라 내부에서 온 것으로 중공 내부 장쩌민 집단의 시진핑을 겨냥한 연속적인 정권 찬탈 쿠데타 행동이었다. 시진핑은 취임 후 반부패와 호랑이 사냥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의 요소가 바로 장쩌민파의 정권 찬탈 쿠데타 행동에 대해 대응하기 위해서다.

장쩌민은 집권 당시 국제사회에서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서방정부의 정치인과 재벌을 매수했으며, 이렇게 매수된 사람들이 끊임없이 장쩌민 집단을 대신해 소리를 냄으로써 정세를 한층 어지럽혔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전형적인 사례로 미국 중국문제전문가 선다웨이(沈大偉)는 3월 갑작스럽게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발표해 시진핑을 비판하고 쩡칭훙을 치켜세웠다. 이는 장쩌민이 국내외에서 배치한 시스템이 여전히 운행하고 있으며 시진핑에 대항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시진핑의 외교는 내정의 연속이다. 시진핑은 취임 후 세계 각국을 자주 순방하며 미국 등 대국 및 주변국과 친선을 도모하고 있다. 그중에는 일본과 관계 완화 등이 포함된다. 이는 장쩌민파가 조성한 외교위기를 해결하는 것과 함께 더 깊은 의도가 있다. 즉 국제상에서 장쩌민이 남긴 영향과 흔적을 제거하는 것이다.

장쩌민이 국제상에 남긴 이익 사슬이 관성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고침으로써 중국을 방문한 각국 정부요인들이 시진핑 정부가 국내에서 진행하는 대사(大事)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시진핑은 현재 장쩌민 집단 숙청작업 중에 있으며 앞으로 공개적으로 장쩌민을 체포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대사는 중국, 더 나아가 세계의 미래에 대해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시진핑은 이 대사를 위해 필요하고 안정적인 국제환경을 마련하는 작업 중에 있는데 이것이 시진핑 외교의 진정한 목적으로 외부의 적을 물리쳐 내부를 안정시킴이다.

다른 한 방면에서 시진핑이 취임 후, 국제적으로 전개한 외교활동을 보면, 유연한 외교수단을 사용해 세계에 평화의 염원을 내비침으로써 중국과 주변국 및 유럽을 포함한 세계 여러 국가의 관계가 우호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과 해상 신실크로드)정책을 실시하고 아시아 개발은행 설립, 국제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 아웅산 수치와의 회담 등의 행보는 아태지역과 세계정세를 안정시키는데 정면 작용을 일으켰다.

외교정책에서의 새로운 조정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이미지 개선에도 도움이 됐다. 시진핑과 마잉주 대만 총통의 정상회담은 역사적인 일보로 기록됐는데, 시진핑이 중공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걷고 있음을 표시한다.

시진핑의 빈번한 외국 방문과 국제무대에서의 표현은 새로운 세계구도가 한창 형성 중임을 외부에 보여주며 또한 중국과 세계에 곧 발생하게 될 거대한 비상시국을 위해 준비와 포석을 깔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샤샤오창(夏小強·대기원 시사평론가) china@epochtimes.co.kr

<저작권자 © 대기원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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