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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공산당에게 박해받은 정치국 상무위원과 가족

기사승인 2017.03.15  10: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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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원 합성)

공산당 100여 년의 역사가 인류와 중국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 고위 관직에 있는 중국 공산당 중앙의 2기 상무위원 중 상당수가 중국 공산당의 잔혹함을 뼈저리게 체감했을 것이다. 이는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모 세대와 친족들이 박해받은 데서 왔다. 본 기사는 시진핑(習近平), 후진타오(胡錦濤), 원자바오(溫家寶), 왕치산(王岐山), 주룽지(朱鎔基), 리커창(李克強), 위정성(俞正聲) 본인과 그 부모 세대의 가슴 졸이던 시절을 이야기하려 한다.
 

시중쉰, 16년간 억울한 누명쓰고, 시진핑은 조사받아

1962년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등은 소설 <류즈단(劉志丹)>의 배후 기획자로 몰렸으며, 마오쩌둥(毛澤東)이 ‘적발’ 해낸 또 하나의 중대한 '반당(反黨)집단'이 됐다.

‘시중쉰 반당집단’은 후에, ‘펑더화이(彭德懷), 가오강(高崗), 시중쉰 반당집단’, ‘서북 반당집단’으로 격상돼, 서북 지역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각급 관료 6만 명가량이 연루되었으며, 이미 사망한 류즈단도 ‘반역자’로 취급당하는 화를 면치 못했다.

문화대혁명이 폭발한 이후 시중쉰은 심한 박해를 받았으며, 수차례 투쟁대회에 끌려가 비판을 받았다. 1968년, 시중쉰은 베이징(北京)으로 돌아와 경비 구역의 ‘감호’를 받았다.

린뱌오(林彪)가 사망한 후,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환경이 다소 완화되면서 시중쉰의 부인 치신(齊心)의 시중쉰 접견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오랜 세월 만나지 못했던 가족이 다시 만나던 날, 시중쉰이 시진핑의 동생 시위안핑(習遠平)에게 한 첫 마디는 “네가 진핑이냐 위안핑이냐?”였다. 이를 들은 가족들은 통곡하였고, 시중쉰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1975년 5월 시중쉰은 ‘감호’에서 풀려나 뤄양으로 돌아왔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시중쉰은 광둥(廣東)성 위원회 서기, 인민대표대회 부(副)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시중쉰의 운명은 그의 가족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는데, 시중쉰이 좌천될 당시 시진핑은 고작 9살에 불과했지만 매번 비난과 편견의 눈초리를 견뎌야 했다. 그의 나이 15세 때 아버지 시중쉰 사건에 연루되어 관련 부처로부터 여러 차례 감금과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가 감금에서 풀려났을 때 몸은 몹시 쇠약해지고 온몸에는 이가 가득했다. 1969년 1월 만 16세가 채 되지 않았던 시진핑은 산베이(陝北) 옌촨(延川)현 량자허(梁家河)의 생산 대대로 내몰려 무려 7년 가까이 그곳에서 지내며 적지 않은 고초를 겪었다. 그 후 아버지의 누명이 벗겨지면서 시진핑의 운명도 크게 변했다.
 

후진타오 부친의 억울한 죽음

후진타오 전(前) 중국 국가 주석의 부친 후징즈(胡靜之)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찻잎 판매점을 운영했다. 1945년부터 1946년, 후징즈는 장쑤(江蘇) 타이저우(泰州)에서 당시 가장 번화한 차이이(綵衣)가에서 ‘후위안(胡源) 찻잎 판매점’을 운영하며 괜찮은 수입을 벌어들였다.

후진타오는 후징즈의 장남이며, 아래로 여동생이 2명 더 있다. 1949년 후진타오 나이 7세, 아내와 사별한 후징즈는 재혼하지 않고 자신의 세 아이들을 아내의 외숙모 댁에 보내 양육했다. 18세에 베이징 칭화(清華) 대학에 입학했다.

후진타오가 10세 때 중국 공산당은 재정 위기 극복 및 전제정치 강화를 위해 일련의 정책을 펼쳤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공사합영(公私合營)’, 즉 개인 기업을 국유로 합병하는 정책이었다. 후징즈의 찻잎 판매점도 이 악운을 피해 가지 못했으며, 후징즈는 타이(泰)현 공급수매합작사(供銷社)의 직원으로 전락했다.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에 후징즈는 현지 일부 사람들의 미움을 사 공금을 횡령했다는 억울한 고발을 당하여 비판대에 서고, 심지어 구금되기까지 했다. 후징즈는 감금 당시 심한 박해를 받아 몸이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 갔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8년, 후징즈는 나이 50여 세로 한 많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당시 36세였던 후진타오는 칭하이(青海)에서 재직 중이었고 이미 부(副) 처장급 간부였다.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들은 후진타오는 온 가족을 데리고 돌아와 상을 치렀다. 부친의 시신을 매장하기 전 후진타오는 당시 타이현 현장이었던 루(陸) 씨와 공급수매합작사 책임자를 찾아가 부친의 억울함을 증명해 달라 청했다.

이를 위해 후진타오는 타이현 최고급 호텔인 타이현 호텔로 지역 유지들을 초대해 접대하며 설득했으나 냉대만이 돌아와 빈손으로 칭하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타이저우는 후진타오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자신의 출생지에 대해 줄곧 이야기하기를 꺼렸으며, 타이저우 유지들이 아무리 ‘사정’해도 26년 동안 단 한 번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원자바오의 작은 할아버지 구금

원자바오는 후진타오 주석 시절 총리직을 지냈다. 그는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조부인 원잉스(溫瀛士)는 1895년에 출생하였고, 이싱푸(宜興埠)의 사립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원자바오의 부모도 오랫동안 교육에 몸담은 교사로, 부친인 원강(溫剛)은 톈진(天津) 제33 중학교의 지리 교사였고, 어머니 양슈란(楊秀蘭)은 톈진시의 한 초등학교 국어 교사였다.

그러나 원자바오의 작은 할아버지 한 분, 즉 원잉스의 어린 동생인 원펑지우(溫朋久)는 1949년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 후 외교관으로 일했고, 중국의 첫 번째 주 제네바 총영사였다. 문화대혁명 기간, 베이징지질대학교에서 공부한 원자바오는 간쑤(甘肃) 성 지우촨(酒泉)으로 보내져 1982년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오기까지 10여 년을 보냈고, 원펑지우 부부는 투옥돼 문화대혁명이 끝날 때까지 온갖 박해를 받았다.
 

주룽지의 ‘하방(下放)'

총리직을 역임한 주룽지에게도 돌아보기 싫은 과거가 있다. 1958년 4월, 국가계획 위원회에서 일하던 주룽지는 돌연 ‘우파(右派)’로 몰렸고, 국가계획위원회 당조직에서 중앙 국가기관 위원회에 그의 당적 박탈을 요청했다. 이때부터 주룽지는 ‘우파’ 누명을 무려 20년이나 쓰고 살아야 했다.

1962년 ‘사상이 잘 개조되었다’는 이유로 주룽지는 국가계획위원회 기관인 국민경제종합국으로 배치됐다. 여전히 ‘내부 통제 인물’에 속한 주룽지는 어떠한 행정 직무도 부여받지 못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주룽지는 재차 ‘5.7’간부학교로 하방(下放·좌천)됐다. 1970년부터 1975년까지 5년간 그는 돼지나 양을 키우고 잡초제거를 하는 등 허드렛일만 했고, 1975년 덩샤오핑(鄧小平)이 다시 복귀할 때까지 그 처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후 주룽지는 베이징으로 돌아와 석유공업부 소속 기관인 전력통신공정공사 사무실 부(副) 주임, 즉 부(副) 과급 직무를 맡았다.

1979년 4월 4일 공산당 중앙에서 <우파분자의 누명 전면 제거에 관한 요청서>를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주룽지는 중국 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소의 연구실 주임으로 승진 발령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주룽지는 20년간 달고 다녔던 정치적 누명을 완전히 벗을 수 있었다.

1998년, 국무원 총리 임명 기자 회견에서 한 미국 기자가 ‘우파’누명을 쓴 시절에 대해 질문했을 때, 줄곧 유창하게 대답하던 주룽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그 시절을 통해 뼈저리게 많은 것을 배웠지만, 유쾌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때문에 그 당시의 일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라고 답했다.
 

리커창의 아버지, ‘호랑이’로 몰리다

리커창의 부친 리펑싼(李奉三)의 본명은 리징더(李敬德)이며 어릴 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가족의 사랑을 받았다. 서당 훈장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애정 어린 교육을 듬뿍 받았다. 그는 글공부에 대한 깊은 이해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1929년 리펑싼은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면서 무진 고생을 하게 된다. 1953년 중국 공산당 전국 간부들을 대상으로 반부패, 반낭비, 반관료주의의 ‘삼반운동(三反運動)’을 전개했는데, 리펑싼은 이와 관련하여 조사를 받고 감금되는 등 ‘호랑이’로 몰렸다. 여기서 ‘호랑이’란 ‘삼반운동’에서 심판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리펑싼의 오랜 친구는 리펑싼의 성격이 직선적이라 ‘삼반운동’ 시 지도자가 사실과 다른 내용을 말하자 몹시 화를 내면서 의자를 들어 현(縣) 위원회 서기를 쳤고, 이 때문에 잡혀 들어가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후에 리펑싼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풀려났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후, 리펑싼은 운동의 무서운 후유증을 예감하고, “문화대혁명이 이대로 이어지다가는 ‘망당망국(亡黨亡國공산당과 국가가 망한다)’의 위험이 있다”고 했다. 그는 리커창을 데리고 성(省)도에서 고향으로 피신했다.
 

위정성의 어머니 감금, 여동생 자살

중국 공산당 정치협상위원회 위정성 주석의 부친은 위치웨이(俞啟威)로, 후에 황징(黃敬)으로 개명했다. 그는 톈진시 시장, 국가기술위원회 주임, 국무원 과학 규획위원회 부(副)주임 겸 제1기계공업부 부장 등을 역임했다. 1958년 정신분열로 인해 넘어져 다쳤고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황징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문화대혁명을 무사히 넘겼지만, 그의 부인 판진(范瑾)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처참한 박해를 받았다. 판진은 문인 집안 출신으로, 그녀의 작은 할아버지가 대학자 판원란(範文瀾)이다. 판진은 문화대혁명 전 중국에서는 드물게 직업을 가진 여성으로 베이징 시 부(副) 시장과 <베이징 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후, 판진은 체포되어 친청(秦城)감옥 독방에 수감되었으며, 1975년 출소 시 언어 능력을 상실하여 오랜 기간 동안 회복하지 못했다. 한편, 위정성의 여동생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될 때 고등학생이었는데, 어머니에 연루되어 교내 비판을 받았고, 이후 정신 분열 증세로 자살했다.

위정성은 문화대혁명 기간 위 씨 집안에서 6-7명이 박해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왕치산 부친이 병든 이유

왕치산은 현(現) 중앙기율위원회 서기이다. 중국 ‘남방주말(南方週末)’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젊은 시절 왕치산의 경력>이라는 글을 게재한 적이 있다. 작가는 왕치산의 어릴 적 친구로 왕치산의 가정환경과 성장사를 기술했다. 이 글에 따르면, 왕치산의 아버지는 내성적이고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왕치산 아버지의 성격은 사실 과거의 경험에 기인한 것이다.

왕치산의 아버지는 1933년 칭화대학(清華大學)을 졸업하고 토목공정 건축업에 종사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후, 항일 운동과 관련하여 국민당에서 상위(上尉) 직함을 맡았고, 급여까지 받은 적이 있다. 이는 그가 1950년부터 시작된 운동에 연루되어 가산을 몰수당하는 빌미가 된다. 크게 놀란 왕치산의 부친은 언행을 삼가게 되고, 덕분에 반우파, ‘반우경(反右傾)’ 운동 중에서 숙청을 면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후, 왕치산의 부친은 국민당의 녹을 먹었다는 오래된 과거의 일로 반역으로 몰렸다. 그는 비판받고 단위(單位:기관, 조직 등) 청소를 명령받기도 했다. 이 같은 경험은 왕치산의 성장 과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심할 바 없이, 상술한 중국 공산당의 재․해임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모두 적색 정권의 잔인함을 겪었지만, 그들은 과연 이러한 비극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찬찬히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위와 같은 비극의 재연을 막기 위해, 다음 세대로 하여금 더는 자신들이 겪었던 공포를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민들의 계속되는 호소에, 어느 길을 택해야 중국 국민을 자유 민주의 길로 이끌 수 있는지가 그들 앞에 놓인 과제라 하겠다. 그 유일한 해결 방법은 중국 공산당 해체일 것이다.

 

린후이(林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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