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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통해 나타난 장군들의 ‘인과응보’

기사승인 2017.04.14  15: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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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인과응보가 있다. 선에는 선의 보답이 있고, 악에는 악의 보답이 있다(대기원)

중국의 역사서에는 억울한 사람을 많이 살육한 무장(武將)은 응보를 받는다는 얘기가 많이 기재되어 있다. 명사(明史)와 사기·이장군 열전(史記・李將軍列傳)에서 발췌한 두 이야기를 소개한다.

명나라 장군 서달과 상우춘의 다른 결과

명나라 초대 황제인 주원장(朱元璋)에는 서달(徐達)과 상우춘(常遇春)이라는 두 무장이 있었다. 상우춘은 적의 성을 함락시키고 나면, 늘 3000명 가까운 포로를 생매장했다. 그러나 서달의 군사는 어디를 가도 죄 없는 서민을 죽이는 일이 없었다.

서달은 사후 중산왕(中山王)이라는 작위를 받았고, 그 명예는 자손 대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상우춘은 40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사후 개평왕(開平王)이라는 작위를 받았으나 그의 자식 대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결국 아들은 용주(竜州)에서 좌천되고 말았다.

서달과 상우춘은 동등한 공로와 명성이 있었지만, 인과응보에 큰 차이가 있었다.

주원장은 항상 장수들에게 말했다. "장군 다운 사람이 돼야 한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본인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하겠다.“ 바로 그대로였다.

서달에게는 은상(銀償)이 자손 삼대까지 주어졌고, 딸은 선조 시대에 황후가 됐다.(대기원)


한조 장군 ‘이광’이 받은 응보

전한(기원전 206~8년) 제7대 황제 무제의 시대, 이광(李廣)이라는 용맹스런 무장이 있었다. 그는 활과 마술(馬術)에 능하여 비장군(飛将軍)이라고 불렸다.

이광이 우북평(右北平)이라는 지역을 진수했을 때 흉노는 그를 두려워했고 오랫동안 지역 내에 침범하지 못해 평화로운 시대가 지속됐다. 그러나 이광의 공적은 인정받지 못했고 작위를 얻을 수 없었다.

이광은 이해할 수 없어 점쟁이에게 물었다. "특별히 뛰어나지도 않는 전공도 인정되어 제후에 임명된 사람이 수십 명에 이른다. 하지만 나는 용맹하게 전투에 임하는데도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제후에도 봉해지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점쟁이는 말했다. "당신은 과거에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 없는지 생각해 보라." 이광은 "과거 농서(隴西)지역을 진수할 때 이미 투항한 800여 명의 병사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인 적이 있다. 그 일은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점쟁이는 "장군이 계속 제후에 봉해지지 않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 뒤 흉노 공격 때 이광은 무제의 밀명을 받은 대장군 위청에 의해서 후방 부대로 밀려났다. 이광이 길을 잃고 싸움에 늦으면, 위청은 그를 엄하게 따졌다. 이광은 너무 억울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또 이광의 손자인 이릉(李陵)은 전쟁에서 흉노에게 항복해 그의 가족 전원이 처형됐다.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한 무장이 결국 악한 응보를 받았던 경우다.

*진수: 군대를 주재시켜 요처를 지키다.
*제후: 봉건 시대, 일정한 영토를 가지고 그 영내의 백성을 다스리던 사람.

 

이상숙 기자

<저작권자 © 대기원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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