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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가족 파괴 정책 ‘성 해방’(하)

기사승인 2017.05.23  18: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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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소련에 가뭄이 들자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가판대에서 의류를 팔았다.(사진=Getty Images)

1926년 소련의 법원에는 이혼에 따른 자녀양육권 문제로 제기된 소송이 많았다. 소련의 국세조사 기록을 보면 같은 해 이혼한 여성 53만 명 중 양육비를 받은 여성은 1만 2000명에 불과했다.

많은 남성은 자녀양육 책임을 피하려 도주 등 여러 수단을 강구했다. 또 전쟁과 내전, 적군에 의한 테러가 많던 시대의 흐름도 남성 수를 급감시킴으로써 남성이 쉽게 양육 책임에서 벗어나 재혼할 수 있게 했다.

여성이 혼자 자녀를 키우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지만,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1926~27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이는 약 1000만 명 중 고작 15만 명이었다.

소련 정부의 출산‧육아 관련 담당자는 “혼인관계가 희미해져 이혼과 함께 독신 여성의 육아부담도 늘고 있다.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자가 인원 감축으로 직장에서 해고돼 사원 기숙사에서도 쫓겨났다. 그녀가 국가의 지원 없이 생활할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카네기멜런대학교의 웬디 골드먼 역사 교수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회주의 체제는 여성을 거리로 내몰아 부랑자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소련의 공산주의 정책은 지방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이혼 시 토지나 농장 등을 분할할 수 있었지만, 여성의 몫은 관리권한이 소련 당국에 귀속돼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었다.

양육 포기가 사회 문제로 대두하자 여러 해결 방안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성 해방’ 정책이 피임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인구통계를 보면 당시 잦은 전쟁과 테러 발생으로 인구가 급감해 많은 출산이 요구됐지만 오히려 자연임신은 적었다.

당시 어린이집과 탁아소 등 양육기관이 부족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대 미혼모 문제에서 보듯 양육기관의 충분한 확보가 곧 편부모의 양육 부담을 덜어주지는 못한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도 물론 중요하며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골드먼 교수는 “이혼한 여성은 일을 했어도 삶의 질이 크게 떨어졌다”면서 이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주장했다.

소련은 1936년 양육 문제가 사회적 재난으로 만연해서야 ‘성해방’ 정책을 포기했다. 그리고 전통적 가족 형태를 되살리기 위해 이혼 수수료를 높이고 가족 부양의무를 포기한 사람에게 높은 벌금을 부과했다. 아울러 낙태와 동성애를 금지했다.

(끝)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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