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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해도 진회(秦檜)는 간신, 악비(岳飛)는 충신

기사승인 2017.10.13  18: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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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고 있는 진회 부부

시대가 바뀌면서 영웅과 간신의 위상이 뒤바뀌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중국 역사상 가장 나쁜 간신으로 알려진 진회(秦檜)가 시대의 희생양이라는 재해석이 나오니 말이다.

그러나 대다수 중국인에게는 진회가 악비를 모함하여 죽이지 않았다면 금나라에 의해 멸망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1090년 가난한 현령 집에서 흙수저로 태어난 진회는 과거에 합격해 출세 가도를 달리던 중 나라에 위기가 닥쳤다. 송나라가 약속한 세폐를 바치지 않자 금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개봉을 포위하여 세폐와 북송의 북방 영토 3진을 위약금으로 요구했다. 이때 진회는 휘종에게, 세폐와 영토 3진 중 1진을 주어 시간을 벌자는 장계를 올린다.

그러나 주전론을 선택한 송나라는 진회의 장계를 기각하고 전쟁을 하기로 한다. 금군에 함락되는 정강의 변이 일어나자 진회는 유능한 장수 악비(岳飛)를 죽음으로 몰고 공포정치를 펼쳐 반대파를 숙청하고 한족의 자존심을 망가뜨린 죄로 비판을 받았다.

당시 송나라는 경제력보다 군사력이 형편없어 전선에서 금나라에 밀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돈을 내주며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또 진회 본인이 금의 포로였기에 주전론의 위험성을 심각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포로가 된 진회는 금의 세력가와 교류하면서 금나라가 송나라보다 문화적 경제적으로 부족하나 군사력만은 송나라를 능가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진회는 주화론을 강하게 주장하였고 악비와 한세충이 주장하는 금과의 전쟁을 반대한다.

진회의 공포정치에 문제가 있었지만, 정강의 변과 전쟁으로 혼란했던 남송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는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도 있다. 하지만 진회는 여전히 간신배, 매국노로 대다수 중국인으로부터 비판받는 것이 현실이다.

청 건륭제 때 진회의 후손 진 대사(간천)는 과거에 급제하고 금의환향하다가 악비 무덤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먼 조상인 진회 부부상을 보고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사람들은 송 왕조 이후로 ‘회(檜)’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했고, 나는 지금 악비의 무덤 앞에서 ‘진(秦)’이라는 성 때문에 참담하구나!”

이 때문에 아직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자를 쓰지 않는다. 진회를 향한 증오감은 이뿐이 아니다. ‘칼을 천 번 맞을지언정 진회와 사귀지 않는다’는 속담도 나왔고, 진회 부부를 본 떠 만든 유조라는 튀김이 있다. 이렇듯 이름, 속담, 음식으로까지 증오감을 표현하는 걸 보면 진회의 악명이 얼마나 높은지 짐작이 간다.

죽음을 앞둔 악비에게 진회가 한 말이 있다.

“앞으로 그대는 충신으로 길이 남고 나는 간신의 오명을 뒤집어쓰겠지만, 오늘은 그대가 졌고 내가 이겼다네. 누가 뭐라 해도 오늘의 패자는 당신이고 승자는 나일세.”

진정한 충신은 누명을 쓰고 죽고, 추악한 간신은 살아남아 호의호식하며 산다는 게 안타깝다.

중국 당국은 대대로 사당까지 지어서 만고 충신으로 추앙하던 악비를 민족 반역자로 모는 한편 매국노이자 간신배 진회를 민족의 영웅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12년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에 대한 재판이 열렸을 때, 충칭에서 몰려온 보시라이 지지자들이 ‘진회가 악비를 재판해서는 안 된다’고 보시라이를 충신 악비에 비유하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해 여전히 악비는 영웅으로 남아있다.

악비 장군

야사에 의하면 악비가 태어날 당시인 1103년, 황하가 범람해 그의 아버지 악화는 익사하고 어머니 요부인은 악비를 안은 채 커다란 바구니를 타고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악비는 북송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을 조직해 금나라에 항거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남송에서 장군이 되어 무공을 세운 명장이다. 얼마나 강했던지 금나라 병사들은 ‘태산을 움직이는 건 쉽지만 악비의 군사를 움직이기는 어렵다’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온건파의 거두 진회와 매번 부딪쳤다. 북송이 멸망한 뒤 백성들이 여진족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남송 일부에서는 여진족과 싸워 국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거세게 일었으며 악비는 그 주전파의 대표 인물이었다.

악비 등 뒤에는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문신이 있었는데 이 문구는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가 늘 하던 말이었고, 일설에는 어머니가 악비의 등에 문신을 새겼다고 한다. 정충보국을 몸에 새겨 평생을 나라를 위해 충성을 하고도 억울하게 죽은 비운의 명장 악비는 중국인들에게 영원히 추앙받는 영웅이다.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을 실시하면서 여진족을 포함한 소수민족을 끌어안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악비에 대한 추앙이 주춤해졌다. 중국은 한족(漢族) 외에 우리 동포인 조선족(朝鮮族), 장족(莊族), 회족(回族), 만주족(滿洲族), 러시아족 등 55개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통일 다민족국가로,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고 한다.

진회를 민족 통일의 선구자로 본다는 주장이 있는데, 소수민족을 끌어안는다 해도 뿌리박힌 사상 인식까지 뒤집을 수는 없다. 진회는 간신이고 매국노이며, 악비는 그 시대의 충신이고 영웅임은 변할 수 없는 논리다.

남송의 수도였던 항주
물의 도시 항주
항주의 서호

 

岳飞-满江红

怒发冲冠,凭栏处,潇潇雨歇。抬望眼,仰天长啸,壮怀激烈。

三十功名尘与土,八千里路云和月。莫等闲、白了少年头,空悲切。

靖康耻,犹未雪;臣子恨,何时灭!驾长车,踏破贺兰山缺。

壮志饥餐胡虏肉,笑谈渴饮匈奴血。待从头、收拾旧山河,朝天阙。

 

만강홍(满江红) - 악비

관을 찌를 듯 화 치밀어 난간에 기대서니 이슬비 그치는구나.

두 눈 부릅뜨고 하늘을 우러러 길게 포효하니 장대한 포부 격앙되누나.

30년 공명이 티끌같이 부질없고 팔천 리 전쟁 노정은 뜬구름같이 덧없어라.

가벼이 여기지 말라, 소년의 머리 백발이 되면 공허하고 비통해짐을.

정강의 치욕을 아직 씻지 못했으니 신하의 한 언제 다 지울런가.

굳센 마음으로 배고프면 오랑캐 살을 씹고 목마르면 오랑캐 피를 마시리라.

맨 선두에 서서 빼앗긴 땅 되찾으면 궁궐에서 천자를 배알하리로다.

 

악비가 죽음을 앞두고 남긴 마지막 시 ‘만강홍(滿江紅)’이다. 노발충관(怒犮冲冠)이란 머리카락이 곤두서서 관모를 들어 올린다는 뜻으로 매우 성난 모습을 표현했다.

국토를 짓밟은 적군의 만행에 분노하던 악비의 애국충정이 반영된 시로, 간신들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마지막 모습에 슬픔이 느껴지는 시다.

항주에서 얼후를 켜는 아저씨

평화는 말이나 문서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있었고, 혁명이 있었고, 충신의 희생이 있었던 항주는 이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여행지로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시대를 풍류 하듯 시민들이 자유롭게 작은 음악회를 열고 시를 읊고 노래한다.

그때 충신의 희생이 있었듯, 지금은 공동체의 이익과 나의 이익이 충돌할 때 정면대립보다 나의 이익을 버릴 수 있는 희생정신이 필요한 시기다.

항주의 서호 야경

 

양기연 기자

<저작권자 © 대기원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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