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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사형집행 前법관 "잔혹함에 지금도 악몽 시달려"

기사승인 2018.11.28  17: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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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살, 독극물주사, 장기적출도 목격

마약 판매상 왕슝인이 사형선고를 받자 오열하고 있다. 그녀는 과거 1999년 광저우에서 200g의 헤로인을 약 437만 원에 판매한 혐의로 구속돼 세계마약퇴치의 날을 맞이한 2003년 6월 26일 사형선고를 받았다(STR/AFP/Getty Images)

중진화(鍾錦化)는 중국 남동부 원저우에서 일했던 전직 법관이자 변호사인데, 자신이 법원에서 근무한 14년 동안 지켜봤던 대량 사형집행과 사형수의 장기 적출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험을 기록했다. 중 변호사는 판사로서 형사부 법정에서 5년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그는 거의 매일 사형수를 다루었다고 했다. 아래에 중진화가 기고한 내용의 일부를 편집해 소개한다.

중국이나 미국 또는 세계의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법복을 입고 법정에서 정의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많은 법률가가 열망하는 영광이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공부했고 운도 따라주어 나는 1994년 7월 법대 졸업 후 원저우의 중급인민법원에 근무하게 됐다. 제1심법원 형사부에서 3년 넘게 법원 서기로 일한 후에 판사로 임명됐다. 그렇게 법원에서 14년을 근무하고 2008년 7월에 퇴직해 변호사가 됐다.

법원에서 보낸 14년 중, 형사부에서 근무한 9년 간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나는 3년 넘게 형사법원 서기였고, 5년 넘게 형사부 판사였다. 나는 거의 매일 사형수들을 다루었으며 한 달에 한 번은 사형을 집행하는 현장을 지켜봐야 했다. 이 글에서 나는 내 머릿속에 자꾸 떠오르는 기억들을 그대로 드러내 밝히고 수년 동안 내 마음을 괴롭혀온 악몽을 떨쳐버리고 싶다.

처음 포박당한 사형수의 신원을 확인하고 사형이 집행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을 때는, 그저 악인을 처벌하고 정의를 지키는 일이니 어쨌거나 그 일은 법관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내가 지켜본 사형 집행 건수가 늘어남에 따라, 나는 잔혹할 뿐만 아니라 그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장면들도 여럿 목격하게 됐다. 그러자 내 생각은 차츰 바뀌었다. 그 일을 정서적으로 감내하기가 점점 어렵게 됐고 나는 악몽에 시달리게 됐다.

내가 처음으로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은 사건은 1996년에서 1997년 무렵에 원저우에 있는 ’쉐산처형장(雪山刑場)’에서 일어났다. 그 일이 내게 아주 충격적인 인상을 남긴 이유는 대규모 총살부대가 26명의 사형수를 처형한 내가 본 가장 큰 규모의 사형집행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형수 중 상당수는 내 고향인 원저우 창난(蒼南)현에서 활동했던 소위 ‘냉동공장’ 갱단과 ‘슈하이오’ 갱단의 조직원들이었다. 당시는 '범죄 강력 단속'이라는 슬로건이 또다시 중국 전역을 휩쓸던 때였다. 그래서 남동부 해안에 위치해 경제적으로 발전한 지역이던 원저우도 뭔가를 당국에 보여줘야 했던 것이다.

처형 당일, 쉐산처형장 주변은 무장 경찰과 공안들로 가득 찼다. 오후가 되자, 많은 사형수들이 완전 무장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각지에서 온 군용차량 및 경찰차에 실린 채 도착했다. 그리고 사형수들은 모래주머니로 쌓은 벽 앞으로 끌려가, 벽을 마주하고 일렬로 무릎이 꿇려졌다. 무장경찰은 각자 장전된 반자동 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형수 심장 뒤쪽 등에 총구를 대고 눌러댔다.

당시에 나는 법정, 재판기록 작성, 공판, 그리고 집행 등의 일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런 장면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었지만, 정부가 내게 부여한 임무를 상기하면서, 나는 주의 깊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형수들을 모두 세어 보았다. 총 26명이었다.

지휘관이 발포 명령을 내리자, 우레같은 총성이 허공 가득 울려 퍼졌다. 죄수들은 사방으로 피를 뿌리며 차례로 쓰러졌다. 내 눈에 별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똑바로 서 있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손으로 얼굴과 머리를 문질렀다. 곧 화장터 인부들이 와서 시체들을 바닥이 납작한 손수레에 실어 갔다.

그날 처형장의 장면을 생각할 때면 늘 어릴 때 봤던 항일전쟁 영화가 떠오른다. 그 영화에서는 일본 군인들이 중국인들을 모아놓고 총을 쏘아 죽였다. 또, 그 장면은 죽은 돼지를 납작한 손수레 바닥에 던져 올려 운반하는 도살장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내 마음은 너무나 무거웠다.

내게 깊은 인상을 준 두 번째 기억은 사형집행을 맡았던 한 경찰관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정확한 시간과 장소는 기억할 수 없지만, 내가 판사가 된 후의 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사형집행 임무를 누가 담당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원저우에서는 대체로 각 구치소에 근무하는 무장 경찰이 사형을 집행한다. 구치소에는 과거보다 사형수가 적어졌지만, 그리 많이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준비를 마쳤을 때, 한 경찰관의 팔다리가 끔찍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사형집행에 처음 참가한 것 같았다. 지휘관이 그에게 곧장 다가가서 떨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그는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 지휘관은 그를 호되게 꾸짖고 나서 발포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총이 발사됐을 때, 떨고 있던 그 경찰관 바로 앞에 무릎이 꿇려 있던 사형수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 사형수는 천천히 일어서더니 자신의 진흙투성이 얼굴을 뒤돌려 그 경찰관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경찰관은 공포에 질려 크게 고함을 지르며 자신의 총을 공중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미쳐 춤추는 것처럼 온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모두 깜짝 놀랐다. 지휘관이 재빨리 달려들어 사형수를 땅바닥에 차 넘어뜨린 후 권총 두 발을 쐈다. 그 경찰관이 사형집행 도중에 무슨 일은 겪은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그가 징계를 받았는지, 그 사건으로 어떤 정신적 상처를 입었는지도 모르지만,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그 공포의 표정만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 있을 것이다.

또 한번은 어느 더운 여름 오후였다. 나는 한 젊은 여자 사형수의 처형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녀는 200g 이상의 헤로인 밀수에 관여한 죄로 원저우 중급인민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최고인민법원에서 사형집행을 승인했다. 그녀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이 내 임무였기 때문에 나는 진행된 과정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긴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구치소에서 끌려오는 내내 소리를 내며 절망적으로 울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하느님’과 ‘엄마’를 불렀다. 등 뒤로 꽉 결박된 그녀의 두 손은 짙은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고,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떨었다. 무릎을 꿇게 된 순간, 그녀는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하느님! 엄마! 하느님! 엄마!" 차마 지켜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총성이 울리자, 그녀는 긴 흰색 드레스를 입은 채 땅에 쓰러졌고 영원히 비명을 멈추었다. 시체를 확인한 검시관은 그녀가 두려움에 변을 지렸다고 말했다.

나는 슬픔에 압도되어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혐오스럽고 증오스런 사형이여!

네 번째 사건은 2001년 아니면 2002년경에 역시 쉐산처형장에서 있었던 독극물주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독극물주사는 1997년 이래 시행된 총살 이외의 처형방식이다. 원저우에 독극물주사 방식이 채택된 것은 2001년 또는 2002년 경이었다. 독극물주사는 사형수가 총구를 직면해야 하는 공포를 줄여준다는 점에서 좀 더 인간적인 집행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독극물주사를 통한 사형집행은 고통과 두려움이 줄어들기는커녕, 집행자의 부주의로 인해 상황만 더 끔찍해졌다.

내가 목격한 집행 건은 내가 다루었던 사건의 사형수에 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규칙에 따르면 내가 그곳에 가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는 독극물 주사가 원저우에 막 도입된 시기였기 때문에, 나와 같은 형사부 재판관들은 사형 집행과정을 살펴보고 익숙해지라는 종용을 받았다.

우리가 새로 개조된 독극물 주사 관찰실에 처음 도착했는데, 방이 처형실 옆에 붙어 있었다. 집행 테이블은 이미 자리에 놓여 있었고, 흰 가운을 입은 몇몇 직원들이 장비들을 이동하고 있었다. 남자 사형수가 처형실로 끌려왔다. 집행관들이 사형수의 팔다리와 머리를 테이블에 묶고 주사 장비를 부착했다. 두 개의 실행 버튼이 있었다. 사형수는 조용했으며 얼이 빠진 것 같았다. 그는 두려움에 굳어 있었다.

한 집행관이 사형집행을 맡기로 했다. 모든 것이 자리를 잡자, 지휘관이 “준비, 시작!”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집행관이 첫째 버튼을 눌렀을 때, 계획대로라면 사형수가 마취되어 수면에 빠져들어야 했으나, 그게 아니라 사형수는 마치 사지가 찢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격렬하게 몸을 비틀어 대기 시작했다. 직원과 경비병들이 난장판 속에서 지지대와 장비를 찢고, 재빨리 그 사형수를 테이블에서 끌어냈다. 그들은 그를 바닥에 찍어 누르고 머리를 총으로 쏘았다.

나중에 우리는 그 집행관이 착각해 순서를 어기고 마취 주사 버튼 대신에 독극물 주사 버튼을 눌렀고, 그리하여 그런 기괴한 일이 생긴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나는 한 사람의 일반 판사로서 아무것도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없었고 단지 침묵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사형집행 외에 의사들이 장기를 적출하기 위해 사형수의 사체를 여는 것을 보게 된 것도 내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전에 이런 일에 대해 조금씩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장기이식 수술을 목적으로 사형수로부터 장기를 적출하는 일은 중국 정부기관들과 사회 전반에 걸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끔찍한 충격이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역시 쉐산처형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총살형이 집행되던 시절이었다. 처형이 집행된 후, 나는 용변을 보러 인근 화장실로 서둘러 달려갔다. 돌아오는 길에 방향을 잘못 들어 작은 건물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분명히 임시 수술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수술대 위에 누워있던 남자는 방금 총에 맞아 죽은 사형수였다. 등을 바닥에 대고 눕혀져 있었는데, 커다란 십자가 형태로 가슴을 가로질러 복부까지 온통 깊이 절개되어 있었다. 복부 한쪽은 밖으로 뒤집힌 채 수술대 가장자리에 매달려 있었고,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2명이 장기를 적출하고 있었다. 방 전체에 독하고 역겨운 냄새가 가득했고, 너무 불쾌하여 나는 토할 것 같았다. 나는 돌아서서 건물 밖으로 뛰쳐나와, 건물 외벽 근처의 잔디밭에 토했다.

아직도 그 장면을 기억할 때마다 토할 것 같은 느낌이 여전하다. 그 일은 내게 '공공연한 비밀’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나는 그 일의 배후에 책임 있는 자가 누구인지, 누가 그 의사들에게 장기 적출을 승인해 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판사로 재직하는 동안 내가 정의의 수호자였던 것인지 아니면 법이라는 허울을 쓴 합법적인 살인자에 불과했던 것인지 나는 제대로 말할 수 없다.

2003년 10월에 나는 법원의 형사부에서 사법 감독부 재판장으로 전근됐다. 청원인들, 오심 사건, 무고 사건 등을 처리하며 그곳에서 5년간 있었다. 2008년 7월에 나는 원저우 중급인민법원에서 퇴직해 중국 사법부를 영영 떠났다.

하지만 악몽이 나를 계속 괴롭혔다. 나는 군중이 나를 단두대 앞으로 끌고 가는 악몽을 꾸곤 했다. 단두대에서 칼날이 떨어지고 나는 숨을 헐떡이며 땀범벅이 돼 잠에서 깨곤 했다.

사형집행은 내 동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힘들었다. 장씨 성을 가진 판사 한 사람은 처형장에서 돌아오다 실신해 논 가운데에 쓰러지기도 했다.

중국에서 형사부 판사로 재판할 때, 나는 가능한 모든 경우에 관대한 처벌을 선택했다. 사형 선고를 하지 않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필사적으로 싸우려 했다. 그 결과, 꽤 많은 동료 판사와 상급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지만, 나는 항상 모든 법률가는 생명과 자유에 대한 존중을 기본적이고 윤리적인 의무로 여겨야 한다고 믿어왔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생명은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 저자 소개

중진화는 망명 중인 중국의 인권변호사이자 전직 판사다. 1994년 8월부터 2008년 7월까지 중국 저장성 원저우시의 중급인민법원 형사부 법원 서기를 거쳐 판사, 사법감독부 재판장을 역임했다.

중 변호사는 2010년 7월부터 2015년 8월까지 베이징의 잉커(盈科) 법률사무소, 상하이 징헝(京衡)로펌, 상하이 준란(君瀾)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근무했다.

2011년 12월 31일 밤, 중 변호사는 자신의 웨이보를 통해 중국 공산당에 대해 정당 및 언론 자유, 민주적인 선거에 대한 억압을 풀라고 요구하는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또 그는 공산당을 탈퇴할 것이며, 공산당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야당을 조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결과, 그는 중국 당국에 의해 소환됐고, 체포하겠다는 협박을 당했다. 베이징 잉커 법률사무소 소장으로부터는 해고 통지를 받았다. 당시 그는 반달 간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2015년 수백 명의 인권변호사와 시민들이 체포됐던 709 탄압 당시 중 변호사도 시골에서 올라온 청원자들과 인권변호사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역시 괴롭힘을 당했고, 경찰 조사를 받았다. 2015년 7월 13일에는 중국 경찰이 체포영장을 가지고 그의 집을 찾아왔지만, 외부의 압력과 지원 덕분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2015년 8월 11일, 중 변호사는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상하이 푸동 국제공항으로 갔다. 3시간 동안의 억류와 몸수색을 겪은 후 그들은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현재는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편집부

<저작권자 © 대기원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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