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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박해를 받은 파룬궁 수련자의 긴 여정

기사승인 2019.05.24  14: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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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고문당할 때는 결코 울지 않았다.” 2019년 5월 16일 맨해튼에서 자신의 신념으로 중국에서 고문을 견딘 파룬궁 수련자 슝원치(熊文旗).(Samira Bouaou/The Epoch Times)

지난 16일, 뉴욕의 중심부 맨해튼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1만여 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세계 파룬따파의 날’을 기념하는 축하 퍼레이드를 화려하게 펼쳤다. 각기 다른 전통 의상을 입고, 천국 악단의 힘찬 선율에 맞춰 행진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파룬궁 수련자 슝원치(熊文旗, 47세)은 지울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쳤다.

슝 씨는 말한다, 중국 “감옥에서 고문당할 때는 결코 울지 않았다”고. 그러나, “중국 정권에 ‘탄압을 멈추라’ 촉구하는 현수막을 들고 고요히 행진하는 세계 각국의 수련생들을 보면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마치 불꽃처럼 이 모든 감정이 타오른다”고.

단지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금도 중국 공산당의 잔혹한 탄압을 받는 동포들의 자유를 위해 슝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파룬궁(法輪功) 수련의 시작, 그리고 박해 받은 나날

상하이 출신 슝원치는 이 수련이 할아버지에게 미치는 영향을 목격한 뒤 1997년 25세 때 파룬궁을 배우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치료할 수 없는 심장병을 앓고 있던 그의 할아버지는 파룬궁을 수련한 뒤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과 기력을 회복했다. 슝 씨는 그에게 무엇이 이러한 전환의 원인이 됐는지 물었다. 할아버지는 슝 씨에게 ‘전법륜'이라는 책을 건네줬다.

책을 읽고 슝 씨가 경험한 가장 큰 변화는 그의 인생관이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진실하고, 선을 행하며,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웠다. 또한, 자주 병에 걸려 열이 나고 허약했던 그는 신체 건강도 좋아졌음을 발견했다.

1998년 말 상하이 정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슝 씨는 직장에서 '뛰어난' 직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마음 안에 이 모든 변화가 내가 실천하는 파룬궁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에서 회의실로 가서 텔레비전 방송을 시청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중국중앙(CC)TV 방송은 당국이 파룬궁을 '이단 종교'로 낙인하고, 수련자들에게 수련을 포기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했다. 그는 어떻게 해야할 지 조차 몰랐다. 그때까지 그는 그저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뒤 바뀌었다. 매일 같이 두 명이 그에게 찾아와 강제로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라고 종용하기도 하고 속임수를 쓰고 협박했다. 방송 등 각종 매체에서는 파룬궁 비방 선전물이 넘쳐났고, 강제로 그에게 그것을 보게 했다. 슝 씨의 상사들은 더 이상 그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일은 당국의 명령에 복종하는 일이었다.

그는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파룬궁을 수련한 개인 경험을 적어 상사와 직장의 여러 부서에 배포했다. 슝 씨는 그 이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중국 공산당에게 평화로운 삶과 인격수양을 추구하는 평범한 시민을 타격하는 일을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1999년 4월 25일, 당시 많은 수련자들처럼 슝 씨도 중국 고위층이 모여있는 중난하이로 가서 파룬궁 박해 중단을 요구하는 대규모 평화 청원에 가담했다. 같은 해 12월 말에는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나가 부당한 중국 공산당의 억압에 항의하고자 했다.

광장에는 이미 제복과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고, 주변에는 경찰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경찰들은 박해 중지를 호소하며 광장에 모여드는 파룬궁 수련자들을 진압하기위해 만반의 준비가 돼 있었다.

경찰은 2000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톈안먼 광장에서 파룬궁 시위자를 구타하고 있다.(AP Photo/Chien-min Chung)

경찰들의 진압에 맞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겨웠고, 몸은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포기하지 않고 슝 씨는 광장으로 들어가 동공(動功) 1장 공법을 시작했다. 연공을 시작하자 마자 옆에 있던 경찰은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고 수송차 안으로 강제로 떠밀었다. 젊은 경찰은 칼자루로 슝의 얼굴을 몇 번이고 내리쳤고, 다른 장교는 뺨을 때리며 그의 배를 걷어찼다. 반 시간 동안 얻어맞은 후, 그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 있었다. 슝 씨는 그 후 상하이로 보내져 구치소에 한 달 동안 구금됐다.

지독했던 고문, 그리고 다시 찾은 자유

2000년 2월 석방된 후 어느 날 밤, 슝 씨는 집에서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있을 때, 공안이 찾아와 그에게 경찰서에 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감지했으나, 슝 씨는 별 의심없이 따라 나섰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경찰차 안에서 슝 씨는 어머니가 급히 건물 밖으로 나와 끌려가는 자신을 보며 망연자실한 채 서 계신 모습을 보았다. 그 때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 날, 슝 씨는 직장에서 그의 수련에 대한 성명서를 배포하고 톈안먼 광장에 수련 하러 간 혐의로 노동 교양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처음 상하이 푸투오 지구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슝 씨는 너무 절망적이고 우울해서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자연스레 단식투쟁으로 이어졌다.

간수들은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약 3일마다 다른 수감자들에게 슝 씨를 꼼짝 못하게 붙들게 하고, 긴 고무 튜브를 코에 꽂아 음식물을 퍼 넣었다. 슝 씨가 계속 먹기를 거부하고 있는 동안, 어머니가 방문해 음식물을 먹을 수 있게 했다. 몇 주가 지나자 슝 씨는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회복 후 다시 구치소로 보내 질까 두려워 그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슝 씨는 베이징으로 피신해 파룬궁 수련자인 친구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약 두 달 뒤, 친구 부부와 슝 씨는 베이징 경찰에 체포됐다. 슝 씨는 상해 노동 수용소에 되돌려 보내져 1년을 더 선고받았다.

2000년 5월 슝 씨는 상하이 1호 수용소로 압송됐다. 그는 매일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꼼짝 못하고 앉아 식사나 화장실 이용만 허락했다. 곧 엉덩이의 살갗이 닳아 없어지기 시작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슝 씨는 다시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감시원들은 그의 사지를 나무 침대에 묶고 코에 삽입된 플라스틱 튜브를 통해 강제로 먹였다. 슝 씨는 넉 달 동안 감시와 구타를 당하며 힘겹게 견뎌냈다. 노동 수용소 감독원은 지독하게 쇠약해진 그의 건강 상태를 보고 두려워했다. 그가 고문으로 죽을 경우 그들이 책임을 져야 했으므로 2000년 10월에 그를 석방시켰다.

집에 돌아온 슝 씨는 파룬궁 수련을 계속했다. 몇 달 만에 그의 건강은 완전히 회복됐다. 기력이 회복되는 동안 슝 씨는 중국 정권의 파룬궁에 대한 거짓 선전을 불식시키고, 파룬궁 수련자들에게 행해지는 박해를 알리기 위해 포스터를 만들어 인쇄했다. 이 자료들은 상하이의 다른 수련자들에 의해 배포됐다. 이후 건강이 좋아지자 슝도 직접 자료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2001년 5월 슝 씨는 여러 명의 사복 경찰관에게 미행을 당한 후, 다른 두 명의 수련자와 함께 또 체포됐다. 이번에는 상하이 티란차오감옥(提籃橋監獄)에서 4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곳의 감시원들은 지역 ‘610 사무실’ 즉, 파룬공 수련자를 박해하는 임무를 맡은 게슈타포 같은 사법 기관으로부터 가능한 한 수련을 포기한다는 서약을 받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세 명의 감시원이 슝 씨를 고문하며, 그의 신념을 포기하도록 했다. 슝 씨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슝 씨는 2년 동안 또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2004년부터 2005년 초까지 약 1년 동안은 감방의 나무 침대에 묶여 있었기에 손목과 발목에는 더러운 밧줄 사이로 고름이 배어 나오고 극도로 가려운 발진이 생겼다.

슝 씨의 의지를 꺽지 못한 당국은 그를 가장 폭력적인 범죄자들이 수용된 교도소로 이송 시켰다. 슝 씨의 감시원은 6명에서 나중에 10명으로 늘어 그의 믿음을 포기하면 형량이 줄어들 것이라고 회유하며 교대로 슝을 고문했다. 슝의 머리를 벽이나 땅에 거세게 부딪히게 하고, 나무 막대기로 발바닥을 때리고, 대나무 빗자루의 더러운 끝을 얼굴에 밀어 넣어 여러 군데 피를 흘리게 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보이는 흉터를 남겼다.

슝원치의 머리에는 2005년 상하이 티란차오감옥(提籃橋監獄)에서 수감자들의 구타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밍후이왕)

2005년 3월은 슝 씨가 가장 극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한 시기였다. 단단한 플라스틱 힐로 슝의 머리를 사정없이 때려 피가 나고, 머리가 너무 부어올라 마치 헬멧을 쓴 것처럼 보였다. 슝이 병원으로 옮겨지자 교도관들은 그가 넘어져 다쳤다고 속이며 고문을 은폐했다.

슝 씨의 머리에 난 부기와 딱지가 낫는 데는 몇 달이 걸렸다. 오늘날까지, 그의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자라지 못하는 부위가 생겼다. 잔인한 죄수들을 시켜 그를 때리게 하고, 그들이 체력이 소진되면 그의 입, 코, 눈에 고춧가루, 모기 퇴치용 기름을 부어 넣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슝 씨는 인내력의 한계를 느꼈지만, 끝까지 스스로에게 말했다. "네가 옳다는 것을 안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어느 날 슝 씨는 다른 재소자들이 구치소에서 이감되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 방법 중 하나는 펜을 먹는 것이었다. 슝 씨는 최후 저항을 각오하고 재소자들이 보지 않는 동안 몰래 펜 두 개를 삼켰다.

펜 하나는 통과했지만 다른 펜은 결국 장과 간 사이에 박혀 병원을 옮겨 다녀야 했다. 병원의 의사들은 그의 몸뚱이가 고문으로 인해 심각하게 손상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의 폐는 감염됐고, 고열에다 혈압은 위험할 정도로 낮았다. 그가 죽을 거라고 생각한 교도소는 2005년 4월 슝 씨의 어머니에게 넘겼다.

펜을 꺼낼 수 있는 병원을 찾은 어머니 덕에 6개월 만에 대부분 회복됐지만, 오랜 고문에 시달려 영구적인 상처를 남겼다. 오늘날까지 등, 복부, 무릎 등에 통증이 있고 오른쪽 다리에 감각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슝 씨는 제조회사 일을 가까스로 찾았고, 평범한 삶을 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전혀 평범해 질 수 없었다. 석방된 후에도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고 있었고,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슝 씨는 경찰을 피하는 법을 배웠고, 자료를 배포하고 다른 수련자들을 몰래 만났다. 이런 삶은 8년 동안 지속됐다.

그러나 ‘경찰이 문을 두드리는 게 아닌가’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살았던 슝 씨의 가족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2013년 슝 씨는 미국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슝의 안전을 바라는 가족들도 동의했다.

거의 14년 동안 공포와 잔혹함에 젖어 살았던 슝 씨의 마음은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뉴욕에 도착했을 때, 그는 즉시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깨달았다, "내 마음의 짐이 풀렸구나! 인생이란 원래 이렇게 자유로운 거야!”

슝 씨는 오늘날에도 뉴욕시의 주요 관광 명소에서 중국 본토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그의 경험, 중국 정권의 실체, 그리고 아직도 계속되는 파룬궁 박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라고 말한다. 박해가 계속되는 한 슝 씨는 가족을 만나러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믿는다,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가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이 글은 지난 20일 영문 에포크타임스가 제임스 슝(슝원치) 씨와의 인터뷰 한 내용을 정리했다.)

은구슬 기자

<저작권자 © 에포크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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